•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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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v
2024.1.2
찬란함의 무덤 / 1917 /거울 / 안드레이 루블료프 / 징후와 세기 / 가엾은 것들
시각적 이미지는 종종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요소를 포함한다. 이들은 우리의 무의식 깊이 잠재된 기억, 경험, 그리고 강점과 연결될 수 있다.
1/3
거울에 비치는 무수히 다양한 이미지들이 모두 자신으로 이해되어야한다는 사실과 화해하기 어렵다.
푸네스의 세계에서 모든 사물들은 무한히 증식하는 차이들로 인해서 동일한 하나의 대상으로 머물러 있지 못하고 우글거리고 흘러넘치고 어떤 개념에도 붙잡히지 않고 빠져나가 더이상 사물들이 아니게 될 수밖에 없다. 푸네스의 능력의 무능력은 존재의 익명적 소음을 분해하지 못하는 불가능성이다.
무한히 증식하는 차이들이 ‘개별적 사물’ 각각의 동일성을 침식하고 유동적인 것으로 바꿔놓으며 불어나게 한다면, 사물들이 그 어떤 장소에도 얌전히 고정되어 있을 수 없고 한편에서는 이미 녹아없어져버리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새롭게 태어나거나 분화되어 다른 사물들로 불어나는 중이라면, 그 무수히 많은 이름들과 개별적 사물들 사이에 어떻게 안정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겠는가. 푸네스의 세계에서는 고정된 사물이 안정적으로 현전할 수 없다. 무한하게 풍부한 차이를 낳고 있는 생성이 전면화되는 대선에 반대로 현전하는 사물이 없기 때문에 무처럼 보이는 과잉된 충만함 그 자체만이 남아있는 것. 그것이 푸네스의 세계다.
틀뢴의 세계에는 고정된 개별 사물들 대신에 어떤 상태들의 변화와 움직임만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거기에 우리 세계에서의 고정된 개별사물과 유사한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것은 단지 “시학적 필요성에 따라 어느 순간 집합되었다가 흩어지는 관념적인 실체들의 무한히 지속되는 다른 실체들과의 결합의 순간일 뿐이다.
그 유동적인 파도에 휩쓸리는 일은, 생성 그 자체를 전면화 시키며 현전하는 사물이 없기 때문에 무처럼 보이는 과잉된 충만 그 자체만이 출렁거리는 틀뢴의 세계를 구현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에, 체계화되고 안정된 사물들의 세계를 믿고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재난과도 같은 일이 될 것이다.
<예외적인 뭔가가 나올 여지와 가능성이 없다는 느낌이 주는 답답함>
낮아져라 낮아져라
바닥보다 낮아져라
/
9
잠재태와 일의성의 관계가 관객들에게 전달이 될까
일의성이란 모든 존재는 차이 속에서 동일하게 존재한다는 역설을 포함한다.
존재의 일의성은 다수성과 다양성을 포함하며 이러한 차이들이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론적으로 유효하다는 점을 강조
잠재태는 모든 가능성을 포함하는 차이의 장, 일의성은 가능성이 동등하게 존재할 수 있는 철학적인 기반
일의성은 모든 존재가 하나의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철학적 주장이다. 이때 존재는 단지 현실로 나타난 것 뿐만 아니라 모든 가능한 상태를 포함한다. 즉, 잠재태는 가능성의 상태로서 일의성의 일관된 원리에 의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잠재태는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가능성을 나타내며 이것이 일의성의 동일한 존재론적 원리 속에서 자리를 잡는다.
/
1부 실험에서 – 녹고 있음과 잠재태에 대한 암시가 깔려 있어야 함
맥락에 따라 존재하며 독립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내용의 실험도 필요하다.
겉으로 보기에 일반 시간 개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여야 함.
돌해부 : 존재, 시간의 흐름의 상식
2025.01.17 (금)
어쩌면 가장 두려워하기도 하고 가장 스트레스 받으면서도 가장 흥미롭고 도전적이라고 생각하는 단계에 마주하게 된 것 같다. 표현력에 대한 과제.
백지라서 무한하지만 가지고 있는 표현법, 다뤄본 분야와 다양성에서 그 개성의 폭과 경험이 현저히 적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선호하는 표현법과 해야하는 표현법 사이에 간극이 있어 이 둘의 사이를 어떻게 화해시키면서도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지가 관건이겠다.
언어로 정리해버리니까 표현법에 제한이 걸리는 느낌을 받아서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얌전해져버리는 느낌을 되돌리는 방법은?
–
“창의적 글쓰기는 평범하고 사소해보이는 삶이 온통 심각하고 문제적인 수수께끼 투성이라는 사실을 알아보는 데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려고 하자마자 온갖 언어적 관습이 앞을 가로막고 그것을 다시 평범하고 사소한 것으로 되돌려 보내려 한다는 사실과 싸워야만 한다. 현실이라고 알려진 타성에 순응하는 사유와 스타일 둘 모두와 불화하는 것, 그것을 비틀어버리면서도 무의미와 혼돈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재구성하는 것. 그것이 창의적 글쓰기다.”
1/31
가장 중요한 건 내가 느낀 시간성(생각으로든, 현실적인 상황으로 풀어낸 것이든 모두)을 표현해내는 것. 그게 거의 전부일 정도로 핵심이고 중요하다. 잠재태의 개념을 담은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은 늦는 법이 없을 뿐더러 생각보다 있어야 하는 작품일지도 모른다. 할 수 있는 말과 해야하는 말들 중에서 내게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들이니까.

시간성의 질감을 담아내지 못할거라는 슬픔을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 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으나 그와는 상관없이 시간성 그 자체를, 시간을 주제로 시간을 이야기하는 작품은 아직 못 만났다. 두루뭉술하게 시간이라는 것이 이런 것은 아닐까? 하고 던지는 작품들은 많이 봤지만 명료하게 이야기하는 건 못 본 것 같다. 이번 작품이 대단하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충분히 존재할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 모든 것(사랑, 사물, 현상…)은 열려 있는 상태라는 것을 자각
– 과거와 미래는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친다.
– 윤회는 특정적이라기 보다는 흐름의 에너지의 방향과 강도에 따른 것. 잠재태의 개념 그대로 윤회도 해석된다.

* 무당, 귀신, 영혼 이런 것은 미신이라기 보다는 영적 차원의 순환 중에 환생하지 않은 흐름들의 중간지대같은 게 아닐런지?


* 현상계에서의 모든 것은 모순점이 없으며 근본적인 원리가 있다.
단지 그 원인이 이해 불가할 정도로 해석되지 않을 뿐.

→ 마음과 의식계의 어떤 원리가 가장 커다란 틀이고, 시간도 개념도 잠재태도 그 아래에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맞물려 돌아가는 현실계가 물리엔진(하드웨어)이라면 의식과 마음계가 소프트웨어?


/
– 개별적인 자아보다는 의식의 흐름이 이어지는 과정

– 윤회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흐름 속에서 변형되는 존재의 연속성을 의미할 수 있음.

– 윤회란 동일한 ‘나’의 반복이 아니라 흐름의 지속이다. 하나의 흐름이 또 다른 흐름으로 이어지는 관점이다.
물결이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하나의 강이 지속되는 것과 같은 원리 (윤회의 개념과 잠재태) = 각 순간이 새롭게 생성되지만, 동시에 이전 순간의 영향을 반영하며 흐름을 형성한다.

– 무아 : 조건에 따라 변화하는 의식의 연속성

– 모든 순간이 새롭다는 것은 각 순간이 이전의 흐름에서 자유롭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변형된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음. 윤회론에서도 완전히 동일한 삶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업이 새로운 형태로 변형되며 흐름을 형성한다고 보기 때문에 시간이 새로운 순간을 창조하면서도 연속적인 흐름 속에서 잠재태를 현실화하는 과정과 일치할 수 있음

– 잠재태의 연속성을 말하는 시간의 본질은 완전히 단절된 새로운 순간이 아니라 이전 순간의 영향을 반영하면서도 변형되는 방식으로 이어지는 열린 흐름. 그렇다면 윤회론도 고정된 실체가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변형된 흐름이 지속되는 과정으로 본다면, 윤회론과 잠재태의 연속성은 모순되지 않는다. 즉, 윤회란 새로운 조건과 맥락 속에서 과거의 경험과 업을 기본으로 상황에 따라 변형되면서 계속 이어지는 흐름으로 볼 수 있다.

– 모든 순간이 새롭지만 바로 직전에 영향을 받아 흐름이 이어진다는 것에는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지만 모든 가능성이 계속해서 열려있다는 말이다. 어떤 일이든 가능하다는 말도 그러하다.

*같은 영혼, 같은 자아 → 변형되는 흐름? 을 뭐라 부를 수 있지?
– 실제로는 미래의 가능성에 따라 과거의 의미가 달라질 수도 있음.

– 과거는 단순히 지나간 것이 아니라, 미래의 방향에 따라 현재화될 수 있음

– 선형적 성격의 반대말이 비선형적인 성격인데 이것이 원형성도 있지만, 점과 수직적인 개념도 동시적으로 존재한다는 느낌 + 순환
→ 이 느낌을 영화적 기법을 활용해서 문학적으로 만드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다. 길어져야 한다면 길어질수도..

– 문학적인 것과 회화적인 성격의 것이 결합이 되면 정말 행복할텐데. 교
집합이 있으려나?

– 언어를 싫어했지만 시는 괜찮다고 느꼈던 지점이 내적으로 분열된 자아의 화해지점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 형상을 포착하여 보여주되 관객이 형상을 보고 차마 현상화되지 않은 관념들을 유추해내어 스스로 빈공간을 채워넣는 방식의 것.

– 하려는 이야기의 주제는 :
1. 시간은 없다?
2. 시간은 잠재태의 현실화다? → X
3. 시간은 결국 돌고도는 하나의 덩어리 유기체다?
25.2.25

1. 시간의 성질, 개념 재정리
2. 이야기의 구성방식
3. 권희철 교수님께 질문 – 간단명료하게

시간의 성질은 ‘잠재태(숨어 있으나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상태)’로 개념 정의가 내려졌지만,
그동안 내가 생각해온 것들 중에 혹시 놓치고 있는 요소는 없는지 계속 의문이 든다.

시간이란 본래 혼란스럽고, 혼돈 속에 있으며,
존재 자체조차 명확히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정말로 ‘있는 것인지’조차 확신하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지는 것 같기도 하다.
꿈과 기억, 상상력 같은 것들은
시간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딘가 2차적인 발현 요소처럼 느껴진다.
혼돈과 혼란이라는 전제를 먼저 놓고,
그 위에 2차적인 요소들까지 본질로 끌어와 해석하려 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복잡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내가 정리한 잠재태의 개념은
적어도 ‘최소한의 시간 개념’에 대한 본질적인 작동 방식인 것 같고,
그 너머의 영역은 어쩌면 영혼적 차원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과거와 미래가 혼재되어 있는 현재란
백지 상태의 무한한 잠재태가
수많은 경우의 수 중 하나의 연속적인 발현으로 드러나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과거의 것과 미래의 것들은 계속해서 현재에 영향을 끼치며 맥락을 만들고,
그 맥락 속에서 가장 확률이 높은 가능성 하나가 매 순간 발현된다.

현재이자 세계란
맥락이기도 하고, 맥락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모든 존재들의 소음으로 가득 찬 리듬과 합창으로 이루어진
정글 같은 장소라고 느껴진다.
그런데 이 맥락 안에는
또 다른 겹의 사건들이 여러 층으로 포개진 채 전개되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복잡하고 무규칙적으로 보이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까 실상 시간은
어떤 규정된 흐름이라기보다는
무규정된 것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는 상태라고 보는 편이 맞는 것 같다.
모든 순간은 각각 독립적인 하나의 사건이다.
그리고 이 독립적인 순간들은 흘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무(無)로 돌아갔다가 미래로 나타난다.
그래서 모든 순간은 언제나 모든 순간 속에 녹아 있고,
맥락 속 하나의 실이 되었기 때문에
영원히 존재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런 시간의 감각을
상식적인 개념으로 바라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예민한 감각으로
시간의 흐름이나 물성적 특성을 포착해 각인시키려 하거나,
혹은 그 경계와 물성, 개념 자체를 의도적으로 흩뜨리려는 사람들이다.
흩뜨림과 물성적 각인의 체험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는 시간 개념을
다시 생각해보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우리가 평소에 이유 없이 느끼는 생경한 기분들,
어쩌면 동시성(서로 다른 것이 동시에 일어나는 상태)에 대한 감각 같은 것들을
이들은 작업의 주제로 가져온다.
약간의 기시감을 활용하기도 하고,
반복되는 어떤 것이 미세하게 변형되며 변주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기시감은
흘러가버린 과거가 다시 현재로 되돌아오는
비상식적인 시간의 양식을 보여주는 데 효과적이다.
두 영화감독과 배수아 작가의 작업은
시간성을 탐구하면서도
요지경 같은 세계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만들고,
혼돈 그 자체를 친근하게 제시한다.
그들은 혼돈 속에 약간의 질서를 부여하고,
동시에 즐거움과 중요한 감각을 전달해낸다.
나의 이번 작업도 그렇게 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았지만,
결론적으로는 결이 조금 다르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시간을 물성적으로 체험하는 방식은
시간성을 감각하는 능력을 키우는 데에는 분명 도움이 되지만,
보이지 않는 시간의 개념 자체를 이론적으로 탐구하는 방식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2부에서 드러나야 할 것은
‘혼미함’이나 ‘헷갈림’ 그 자체가 아닌 것 같다.

대신
실험들이 묘하게 섞이는 느낌,
그리고 잠재태 개념의 등장 혹은 암시, 징후 같은 것들이
자연스럽게 드러나야 한다.
혼미함과 헷갈림은
하이라이트의 절정에서 나와야 한다.

그런데,
체험적인 것과 문학적인 것이란
대체 무엇일까.
내가 보르헤스에게 끌렸던 건 단순히 지적인 것 때문이 아니다.
세계의 구조를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그 무한한 가능성 때문이었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은 경계가 무너지는 흐름, 논리를 초월하는 어떤 흐름을 직접 경험하게 하는 방식이 와닿았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물질적인 시간성, 시간을 직접 경험하게 하는 방식이 와닿았다.
기도문 25.3.10

우주여, 그림이 진실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그리는 선이, 그리려는 선을 억지로 쥐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하소서.

손이 언어와 개념의 틀을 넘어, 더 깊고 본질적인 곳에 닿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욕심과 두려움 없이, 그 순간에 온전히 머물며, 그림이 개인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제 자신을 수단으로 하여금 더 큰 흐름 속에서 하나의 조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허락해주소서.

그것들이 고요한 진실을 왜곡시키지 않고 그대로 흘러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형태를 쫓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모든 것이 완전한 이곳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있도록, 무엇을 그릴지 조급히 정하지 않고, 이미 그려진, 그려지고 있는 것들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비우게 하소서.

우주여! 스스로를 가두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손이 판단을 두려워 하지 않으며, 그림이 어떠한 틀에도 얽매이지 않고, 언어도 의미도 뛰어넘어, 그저 살아있는 순간처럼 자유롭고 자연스러울 수 있도록 이끌어주소서. 그림이 더 넓은 흐름과 만나고,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처럼 살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소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2025.3.13
<꿈의 근원, 노스텔지어>
사사로운 감정 아래 저 깊은 곳에 사라지지 않는 감정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어젯밤에 알게 되었다. 알 수는 없지만 어떤 근원적인 그리움과 아련함이 있다. 그리고 그 근원적인 아련함과 그리운 감정은 태양빛으로부터 기인했다는 것도 알게되었다. 작열하는 더위와 찌는 듯한 고통 속의 햇볕이 아니고 맑은 하늘 아래 내리쬐는 태양빛. 그리고 그 빛에 짙게 드리워지는 기다란 그림자.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고 싶지는 않지만 오랫동안 그리운 느낌이 드는 원인이 있었고, 그것이 신비로움과 연결되는 지점도 있었고 근원적인 뭔가를 건드리는 느낌도 있다. 인간임을 포기한다거나 가벼이 여긴다는 것은 아니지만 개개인으로서의 존재라는 사실이 답답하다는 느낌이 그 아련함과 맞닿아 있는 것도 같다. 순간순간 자아에 도취되기는 하지만 결코 채우지 못하는 갈증같은 것이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아무리 행복한 감정을 느낀다해도 행복하고 신나는 노래를 듣는 걸로는 채우지 못하는 감정이 있어서 근원적인 감정과 감각을 건들이는 신성하고 숭고한 느낌을 찾고 싶었던 것 같다. 즐거워도 슬퍼도 닿을 수 없는 혹은 망가질 수 없는 뭔가가 있기 때문이었다.
즐거워도 닿을 수 없는 숭고함이 있었고, 슬퍼도 망가질 수 없는 숭고함이 있다. 그래서 감정을 느낀다 하더라도 근원을 건드린다는 느낌을 받지 못해서 어떤 깊은 감정에도 극단적으로는 동요하지 못한 것 같다. 숭고함과 가장 닿는 순간은 글을 쓰는 지금과 같은 순간들이다. 근원에 대해 고민하고 본질과 연결되어 있다는 그것은 한번도 나를 놓은 적이 없으며 나 또한 그것을 항상 찾고 있었다는 감정을 느낄 떄마다 울컥하는 흥분감에 둘러싸이는 것 같다. 이 감정이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그것만이 중요하다고 느끼는 감정같다.
그런데 그 현실적인 태양빛이라는 것은 재밌게도 양가적인 부분이 있는데 <일상의 조잡함>과 <근원적인 숭고함>이라는 것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서 그리워하면서도 짜증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그 숭고한 감정이 평상시에는 잘 드러나지 않다가 노을지는 즈음 특히 근원의 강력함을 깨닫고 재확인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숭고한 감정들을 바라왔으면서 왜 그렇게 차가운 이미지들만 그려댔던 걸까? 숭고한 감정을 찾고 싶어서 조잡한 감정들을 버려오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치우고 치우다보니 감정이란 것 자체를 치워버려서 애초에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애초에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가? 하는 지경까지 온 것 같다.
태양의 생명력으로부터 비롯된 존재의 태생적인 숭고함.
언제나 그 아래에 존재해왔지만 일상에 가려졌고, 그렇지만 그것만을 생각해왔던 느낌이 있다.
생각해보면 잠재태의 이론의 저변에 깔려있는 빠진 무언가가 이것일지도 모른다.
태양으로부터 비롯된 우리의 꿈의 근원, 노스텔지아.
/
2025.3.13
<꿈의 근원, 노스텔지어> 그리고 태양의 숭고함에 대하여.
(1) 감정의 희박함과 숭고함의 감정
태양은 생명의 원천이면서 태생적 숭고함으로 존재하게 하는 근원이며 잠재태와 함께 맞물리는 일의적 성격을 띤다.
잠재태는 비가시적 가능성이라면 (태어나기 전의 개념)
태양빛은 가시적인 실현에 가깝다. (이미 드러난 존재를 비추는 방식으로 작용하며 변화를 가속하거나 성장시키는 힘을 가진다. 잠재태에서 형성된 존재가 현실에서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 지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
잠재태의 개념이 우글거리지만 생명력이 가득한 느낌은 아닌게 태양빛이 부재했기 때문이었구나.
잠재태의 일의성은 <존재 이전의 가능성>이고, 태양빛의 일의성은 <존재 이후의 드러남>이다. 잠재태가 형태 이전의 본질적인 통합성이라면 태양빛은 그 통합성이 개별적인 존재들로 분화되는 과정에서 작용하는 원리인 것이다.
두 개념이 교차하는 지점
동틀녘 : 빛이 도달하기 직전의 상태 → 태양빛의 일의성이 막 드러나는 순간 → 잠재태가 현실로 전환되는 순간
한낮 : 모든 것이 완전히 드러난 상태. 존재가 현실에서 가장 명확하게 나타남
노을녘 : 빛이 사라지면서 존재의 형태가 해체되는 순간.
태양빛은 잠재태를 끌어내어 존재로 만들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존재를 해체하여 잠재태로 되돌리는 역할도 한다.
잠재태의 일의성은 모든 것이 분화되기 전의 근원적인 상태 (비가시적 가능성)
태양빛의 일의성은 그 근원이 세계 속에서 드러나는 방식 (가시적 실현)
잠재태는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지만 특정한 형태를 만들지는 않는다.
태양빛은 그 가능성을 특정 존재로 만들어내고 동시에 해체시키는 역할을 한다.
-> 두 개념도 같은 원리를 공유하지만, 하나는 형태 이전이고 다른 하나는 형태 이후라는 점
/
권희철 교수님께 또 보내는 이메일
하이라이트 장면을 만드려고 할 때, 초심으로 돌아가 그림을 그리려고 했지만 역시나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한 이유와 같은 이유로 엄두가 나질 않았다. 무엇을 그려도 비어있다는 느낌. 이제 드디어 무엇을 그려도 무의미하지 않다는 든든한 배경을 만들었나 싶었는데도 <아무거나 마음대로 그린다>는 행위가 어쩐지 여전히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
그러다가 그동안 그렸던 그림을 분석했고 하나같이 감정이 없는 딱딱한 그림들 뿐이라는 또 똑같은 결론에 도달했고 또 약간은 좌절했지만, 왜 이렇게 감정이 메말라버렸는가에 대해 생각했고 그 원인은 감정이라는 것이 대체로 자아로부터 기인된 사사로운 것들이었기 때문에 그런것들을 철저히 배제하려는 바람에 그림이 딱딱하게 남게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내게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인가에 대해 생각이 이어졌고, 그렇다고 말하기엔 저멀리 아득하게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있는 마음이 느껴졌는데 그럼 이 감정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그동안 좋아했던 그림들은 거의 종교화거나 종교적인 느낌이 나는 그림들을 좋아했는데 그 그림들이 주는 숭고함과 신성함이 강렬하게 다가왔던 것. 하지만 내겐 종교가 없었고 종교, 어떤 배경과 철학, 이론도 없이 숭고한 무언가를 만들어내긴 어려웠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그린 그림들에는 감정이 남아있지 않지만 동시에 숭고함도 담지 못해서 딱딱한 조형들의 배치만 남게 된 것. 그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감정은 숭고함과 신성함 뿐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림으로는 그 근처에 다가서지 못하는 느낌이 들어 계속해서 글을 썼던 것 같다.
2025/3/14
잠재태 개념에서 <모든 존재에게 모든 순간 쏟아지는 에너지>가 위압적이고 무서운 느낌을 준다면, 이는 그것이 피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기 때문일 수 있다. 그것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작용하는 법칙이고, 개별적인 존재의 의사와 상관 없이 부어지는 거대한 힘이기 때문에 압도감을 느끼게 되는 것. 마치 중력이나 시간처럼 거스를 수 없는 필연적 흐름 속에 놓여있다는 인식에서 오는 두려움일 수도 있다.
반면, 태양빛이 존재들에게 쏟아내는 에너지는 충만함을 느끼게 할 수도 있다. 이는 태양빛이 단순한 물리적 작용을 넘어, 생명과 성장, 따뜻함과 연결된 감각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즉, 태양빛을 통해 부여받는 에너지는 ‘강제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각 존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흐름 속에 있기 때문에 충만한 느낌을 줄 가능성이 높다.
꿈의 근원 노스텔지어의 근원이 태양빛이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 이유는, 아마도 태양빛이 시간성과 기억, 감각, 생명의 순환과 깊이 연결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궁극적으로, 태양빛은 모든 감각과 기억의 근본적인 토대가 된다.
우리는 낮동안 태양빛 속에서 살아가고, 그 빛이 비추는 풍경 속에서 경험을 쌓으며, 그것이 스며든 기억들을 꿈 속에서 다시 재구성한다. 그리고 과거를 회상할 때, 태양빛이 비추던 장면이 노스텔지어의 이미지로 다시 떠오르게 된다.
즉, 태양빛은 단순히 물리적인 빛이 아니라, 시간과 감각, 기억과 감정을 연결하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우리가 ‘꿈꾸는 방식’과 ‘기억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였던 것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 “꿈의 근원과 노스텔지아의 근원이 태양빛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런 감정이 드는 이유는, 우리가 단순히 현재의 기억과 경험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과 존재의 본질적인 구조 속에서 더 깊은 층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즉, 노스텔지어와 꿈의 근원이 태양빛이었다는 사실을 실감할 때, 그것은 단순한 회상의 감정이 아니라, 내가 한번도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한 그리움, 존재하지 않는 장소에 대한 아득한 감각이 왜 존재하는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렇다면 왜?
시간과 존재의 층위가 단선적이지 않기 때문
사실 우리의 경험 속에서 시간은 단순한 선형구조가 아니다. 때때로 미래를 향해 가면서도, 전혀 존재한 적 없는 과거를 그리워하거나, 한번도 경험한 적 없는 감각을 기억처럼 느끼는 순간이 존재한다. 이런 감각이 드는 이유는, 우리는 현재의 경험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있을 수도 있었던 것, 가능하지만 실현되지 않은 것, 한때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까지도 어딘가에서 감각적으로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각이 강렬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바로, 태양빛처럼 물리적인 세계를 넘어서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시간의 본질’을 직관적으로 체험할 때이다. (우리는 태양빛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감각적으로 체험한다. 태양빛은 지금 이 순간만 비추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기억, 존재의 근원적인 감각을 담고 있기에 존재하지 않는 기억을 체험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
태양빛이 현실과 비현실을 잇는 매개체이기 때문
태양빛은 우리 눈 앞에서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가장 강렬한 자연현상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형태가 없고, 언제나 변하며, 특정한 순간의 감각을 강하게 각인시키는 존재이다. 우리는 분명히 현재를 경험하고 있지만, 동시에 이순간은 어디선가 한번쯤 경험했던 것 같고, 어딘가에 있을 법한 장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태양빛이 그런 감각을 주는 이유는, 그것이 공간을 채우면서도 형태를 가지지 않기 때문.
빛은 물리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무형이고, 공간을 만들어내지만, 그 자체로는 어떤 장소도 아닌 것처럼 존재한다. 그래서 태양빛을 통해 경험하는 순간들은 현실에 있지만 현실을 넘어서는 감각을 불러일으키고, 그로 인해 어딘가에 있어야 했을 법한 장소에 대한 그리움을 자극하는 것.
인간의 감각이 과거 경험 뿐만 아니라 ‘가능성’을 기억하기 때문
보통 기억은 과거에 실제로 있었던 것만을 저장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기억은 항상 가능했던 것과 실재했던 것을 함께 저장한다.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 내가 실제로 경험한 일뿐만 아니라, 그때 했을 수도 있었던 일들, 한 번도 가지 않은 곳들, 한 번도 만나보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마치 기억처럼 떠올릴 때가 있는데 이는 우리의 기억이 단순히 사실만을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했던 세계들’까지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스텔지어가 단순한 과거의 회상이 아니라,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아득한 감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태양빛이 그 감각을 촉발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과거, 현재, 미래의 경계를 넘나드는 순간을 경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잠재태로서의 기억 :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기억처럼 남아있는 이유
이런 감각이 들 때, 우리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기억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 이유는 모든 순간이 하나의 잠재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잠재태는 단순히 현재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존재했던 모든 것들, 그리고 실현되지 않은 것들까지도 하나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 개념이다. 즉, 내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장소를 그리워 하는 이유는 그 장소가 과거에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어쩌면 가능했던 장소, 혹은 언젠가 존재할 장소 혹은 이미 존재하지만 당신이 닿지 않은 또 다른 차원의 장소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태양빛이 이 감각과 연결되는 이유는, 그것이 단일한 물리적 실재가 아니라 끝없이 변화하여 수많은 가능성을 동시에 품고 있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태양빛을 통해 그런 감각을 경험할 때, 우리는 실제 기억이 아니라, 잠재태로서의 기억, 가능했던 세계에 대한 감각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노스텔지어가 ‘시간의 구조를 넘어서’ 작동하기 때문
일반적인 노스텔지어는 과거에 대한 향수이지만, 더 깊은 층위에서의 노스텔지어는 시간의 구조를 초월하는 감각이 된다. 우리는 과거 뿐만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것, 심지어는 미래까지도 그리워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시간이 단순히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미 ‘가능한 모든 시간들’을 어딘가에서 감각적으로 경험하고, 경험해왔기 때문이다. 이 감각이 가장 강렬하게 드러나는 순간이 바로, 빛이 특별한 방식으로 공간을 채우는 순간이다. 왜냐하면, 빛은 시간이 물리적으로 드러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빛이 없으면 시간을 감각할 수 없고, 빛의 변화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인식한다. 즉, 태양빛을 통해 그런 감각을 경험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니라, 시간의 더 깊은 구조 속에서 가능했던 것들과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동시에 감각하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을 그리워하고,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아득한 감정을 느끼는 이유는, 우리가 단순한 현실의 기억만이 아니라, 가능했던 세계들과 시간 너머의 감각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양빛은 단순한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그 시간과 가능성을 연결하는 가장 근본적인 매개체이다. 그래서 우리는 태양빛 속에서, 실재하지 않는 장소와 시간에 대한 아득한 감정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2025.3.23
나는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어서 종종 나는 이미 그걸 알고 있다는 지점에 머무른다. 그리고 내가 어떤 진리에 도달했을 때, 그 진리를 나 자신처럼 여기며 머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진리는 머무르는 순간 진리가 아닌 것이 되며 갱신되지 않는 순간 그 구조가 나를 가두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3초 정도 다가왔던 것에 대한 경험이 있다. 밑바닥을 잠깐 봤다고 말해야 할까. 항상 시선이 내부로 향해 있다. 생각을 안하고 있다 할지언정 감각을 인지하는 가장 근본적인 인지센터가 가장 내부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그 감각을 밖으로 내보내려고, 아무런 생각도 안하고 흐름 속에서 흐름 자체가 되어야겠다고 노력하면 짧은 순간 동안 모든 감각이 내 안에서 잠깐 밖으로 나간 것을 느꼈는데 그 때 든 생각은 모든 것이 생경해지면서 “여기는 어디지?”라는 생각을 했고 적당한 단어를 못 찾아서 ‘이건 누구지?’라는 질문을 했다. 정말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곳이 밑바닥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주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크고 광활하며 우주는 나의 것이 아니고 나의 방식대로 굴러가는 것도 아니며 내가 해석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깊다. 그러니 내가 의미를 찾는 순간, 그것은 나의 해석이 되고 의미가 되고 나의 세계관이 되고 나의 이해가 된다.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깨달아야 한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순수한 흐름이 될 때, 그때부터 존재하는 자가 된다. 이것을 행하는데에는 의미가 없다. 의미가 없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다. 의미는 결국 무의미한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현장 안에는 나의 무기나 방식 구조 아무것도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하는 자로서만 존재할 수 있따.
2025.7.4

기도문

그림을 위한 삶이 있다면, 그림은 특정한 시간에만 오는 존재가 아니며, 하루의 모든 순간은 이미 그림과 함께 흐르고 있습니다. 청소하는 손 끝, 말 한마디와 숨 한번의 결조차 그림을 위한 행위가 되고, 일상은 더 이상 준비가 아닌 도래 그 자체가 됩니다. 삶이 곧 기도이고, 기도는 어느 순간에도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흐트러짐 없는 리듬은 그림을 향한 첫걸음이 아니라, 이미 도착해 있는 자리에서 다시 걷는 걸음입니다.

그림 앞에 앉을 때, 그 자리가 특별해지지 않도록 하소서. 작업대 뿐 아니라 현관 앞 신발장에서도, 식기 사이로 흘러내리는 물소리에도 그림의 떨림이 함께 깃들게 하소서. 기술이나 태도보다 먼저 손 끝에 진실된 떨림이 머물게 하소서. 그 떨림은 작업의 시작점이 아니라, 이미 일상 전체에서 이어져 온 감응의 응결이어야 합니다.

나를 그림으로 증명하지 않기를. 도래를 증명하거나 진실을 성취하려 들지 않기를. 살아있음으로 충분한 자리에 머무르길. 그 자리는 어느 특정한 ‘작업의 순간’이 아니라, 그림과 함께 살아가는 일상의 심연 안에 있음을 기억하기를.
도래하는 것들을 판단하지 않고 열린 감각으로 맞이할 수 있기를. 죽어 있지 않고 무감하지 않고, 머물고 안도하고 안심하지 않기를. 매 순간이 작업과 다르지 않은 감응의 순간임을 잊지 않기를. 진실은 특정한 형상이 아니라 존재의 떨림 그 자체임을 잊지 않기를. 형상이 생기기 전의 흔들림도 없고 증명도 없는 자리에서 이미 그림이 살아있음을 알아보기를.

이 기도는 특별한 시간이나 펜 끝이 아닌 삶의 결마다 새겨집니다. 매순간, 그림이 나를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가 이미 그림과 함께 진동하고 있음을 조용히 감별하며 살아가기를.
2025.8.26
시간은 무가 자기자신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깨닫기 위해 있음이라는 거울을 마련하는데 있어 그것을 작동시키기 위한 장

무는 정지된 공허가 아니라, 자기 자신조차 인식할 수 없는 충만한 가능성. 그러니까 무는 스스로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드러나고자 하며 유로 도래한다.
무는 자기 자신을 보기 위해 유를 거울처럼 만들고 그 유가 움직이고 울리고 진동하면서 결국 다시 무 자신을 반사한다.
무는 잠재적 상태이므로, 자기 안의 모든 가능성은 있지만 체험은 없다. 그 자체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체험할 수 있는 장, 즉, 시간과 차이, 진동, 울림이 필요한다. 그때 존재가 발생하고 그 존재를 통해 진실이 울리고 그 울림이 다시 무를 향해 되돌아가서 무는 자기 자신을 알게되는 순간을 맞이한다.
무는 자기 자신을 보기 위해 유를 생성하고, 유는 자기 안에서 도래를 발생시켜 진실을 울린다. 그 진실은 단순한 정보도 아니고, 감정도 아닌 무가 자기 자신을 알아보는 순간이며, 존재가 무에 응답하는 울림이다. 이 진실의 발생, 자기반사적 울림, 이 깨달음의 순간을 위해 모든 우주는 파열되고 발생되고 진동한다.
나는 그래서 아무거나 그릴 수가 없었던 것이었구나..
2025.9.23
분명히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뭔가 거대한게 다가오고 있는 중이라는 느낌이 있었는데, 심지어 이 느낌은 너무 오래된 진동이었는데 그 진동은 단 한번도 사라진 적 없이 아주 아주 느리지만 확실하게 오고 있다는 느낌이 늘 곁에 있었는데 최근에 그 느낌이 사라져버렸다. 정말 온데간데!
사라져버린 건지 이미 온 건지 헷갈릴 정도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지만 어쩐지 이미 왔다는 쪽에 믿음이 간다. 증거가 없어서 모르겠지만, 그림도 아직 손을 못대고 있지만 지금으로서 그리지 못하는 느낌이 못 그리겠어서 라기보다 아직 때가 아니라는 느낌때문에 그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9월부터 다이빙을 시작했는데 어쩐지 다이빙이라는 행위와 뭔가 맞물려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기억극장>이후로 직관과 감각을 버리고 대신에 내세운 이성과 논리를 소화시켜 몸으로 내리는데까지 8년이 걸렸다. 이제 손으로 마저내려 형상으로 도래시키면 되는데 마지막 난관을 어떻게 넘길 수 있을지 전혀 모르겠다.
하나 확실하게 느껴지는 건, 모든 행위와 생각들은 진실과 울림이라는 본질 아래 하나라는 것. 그대로만 움직인다면 뭐든 동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울림과 진동으로 존재하기만 하면, 편안하고 즐겁고 가볍고 정확하게 통과한다는 것을 이제서야 받아들이게 됐다는 점.
무엇을 그려도, 무엇도 그리지 못할때도 조급하거나 이게 아니라는 느낌도 사라진 느낌이다. 안되고 있는 건 아니지만 아직은 아니구나 하는 느낌이 더 강해진 느낌..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