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 불가능한 공포, 울림, 기묘한 안도

만만한 얼굴을 한 無의 무시무시한 실체

기고만장하던 무당이 신의 분노에 몸을 벌벌 떤다

악몽의 공포

자아가 작동하지 않는다

논리가 작동하지 않는다

의미가 작동하지 않는다

세계의 안정성이 사라진다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다

2026.3.4

고야, 베이컨, 고흐의 그림을 볼 때마다 궁금했다. 그림 속에 흐르는 그 기묘한 정적과 에너지는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처음에는 화면의 연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소재나 구도, 붓질이나 색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그 그림들에는 그림을 그리던 순간 화가의 존재 정렬 상태가 그대로 투과되어 있었다. 그래서 왜 이 그림이 좋은가를 설명하려고 하면 화면의 어떤 부분을 골라도 모두 정답이 된다. 틀려 보이는 붓질조차 정답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나는 한동안 이 그림들의 형태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이 이미지 말고는 다른 형태가 나올 수 없었고 저 화가들이 정확히 그 정답을 맞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었다. 다른 형태가 나왔어도 상관없이 정답이 되었을 것이다. 이미지가 어떻게 나오든 존재의 상태가 통과만 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형태는 중요하지 않다. 구도도 중요하지 않다. 붓질도 중요하지 않다. 색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 존재 정렬 상태에서 나온 (의도를 비운) 에너지를 화면에 그대로 통과시키겠다는 의지.

존재의 압력이 충분히 강하면 형태는 저절로 맞아떨어진다. 형태는 출발점이 아니라 결과일 뿐이다. 그림은 존재의 상태가 화면을 통과한 흔적이다.

그래서 걸작을 보고 있으면 이상한 느낌이 든다. 이렇게 그려야 할 이유도 없는 것 같고 다른 이미지가 나와도 상관없었겠지만 이상하게도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 그림들은 이미 존재의 에너지가 가장 정확하게 통과한 흔적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정렬이 핵심적인 이유는 정렬이 이루어질 때 인간의 행위는 처음으로 존재 전체의 표현이 되기 때문이다. 정렬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이 부분적이다. 생각의 일부, 감정의 일부, 습관의 일부가 움직일 뿐이다. 하지만 정렬 상태에서는 존재 전체가 한 번에 작동하게 되는데 이때 인간은 자신의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상태가 되고, 그때 나오는 말, 행동, 그림, 음악은 단순한 기술적 산물이 아니라 존재의 사건이 된다.

2026.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