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텐 매커니즘으로 다시 시작해보고자 했다. 중간에 한 번 뒤엎고 나서 뭔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리는 와중에 뜬금없이 발견한 처음 보는 고흐의 꽃 그림을 보고 충격먹어서 손이 멈추었다.

화면 가득히 차 있는 에너지를 보아라.. 그야말로 꾹꾹 눌러담기다 못해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암만 내 존재 상태를 점검하고 마음을 가다듬고 선도 가다듬고 도를 닦아봐야 기교와 기술에 속할 뿐이라는 것을 느껴버린 것 같다.

이러한 이유로 이번에도 그림 그리기에 실패했다. 그러다가 하이라이트 장면의 큰 줄기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은연중에 화면이 바글바글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반대로 하나의 물체가 조용하게 변화하는 모습이 더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컬러로 진행하려고 했으나 본편과 마찬가지로 흑백연필로 제작하는 것이 더 진실되지 않나 싶기도 했다. 풀컬러로 바글바글하고 근사하고 멋진 화면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도 불필요한 자기증명적 욕구였다고 생각이 들어서 이 방법들이 상대적으로 단촐하더라도 적어도 스스로를 속이는 방향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음 그림은 어떻게 해볼까? 초심으로 돌아가 공책에 연필로 그려보자. 그리고 왠지 지금부터는 그림 그릴 때 음악을 듣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입시 이후로 그림 그릴 때 음악을 듣지 않은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 음악을 들으면서 그림을 그리면 그리는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결국 그어지는 선들에 에너지? 밀도? 같은 것들이 흐릿하게 분산되는 느낌을 받았다.

2026.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