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야 내가 어떤 장면에서 반복해서 울었는지 조금 알게 되었다.
완전하고 맑은 선이 드러나는 순간이 아니라, 어떤 존재의 선한 마음이 현실을 통과하며 서툴고 이상한 형태로 겨우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선은 언제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보호하려는 마음은 지나친 간섭이 되기도 하고,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은 상대를 붙잡는 힘으로 바뀌기도 한다.
진심이 있었다는 사실이 그 왜곡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다만 눈앞에 나타난 잘못된 형상만으로 존재 전체를 확정할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동안 새로운 형태를 만들고, 익숙한 그림의 습관에서 벗어나는 일을 오래 고민했다.
하지만 형태를 낯설게 만드는 것만으로는 내가 전달하려던 감정에 닿지 못했다.
이제는 무엇을 그릴 것인가보다, 그 형상을 움직이게 하는 최초의 방향이 무엇인가를 먼저 보려고 한다.
어떤 움직임이 다른 존재를 감싸려다 찌그러뜨리는지, 하나가 되려다 흔적만 남기는지, 무너지는 과정에서 다른 통로를 만들어내는지.
선과 왜곡을 서로 반대되는 이미지로 나누지 않고, 하나의 움직임 안에서 함께 보려 한다.
아름다운 것 안에 기괴함이 있고,
기괴한 움직임 안에 다정함이 있으며,
파괴되는 과정이 동시에 다른 탄생이 될 수 있는 상태.
내가 찾고 있는 이미지는 아마 그 사이에 있다.
이 발견은 하나의 주제라기보다 작업을 판단하는 기준에 가까워졌다.
형태를 얼마나 분명하게 보여줄지, 변형의 중간을 얼마나 오래 남겨둘지, 카메라가 언제까지 기다릴지, 장면을 어디에서 끝낼지가 모두 같은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 장면 안에서 최초의 선은 어떻게 현실을 통과하고 있는가.
왜곡된 뒤에도 그 방향은 완전히 사라졌는가.
관객은 그것을 이해하기 전에 먼저 감각할 수 있는가.
새로운 시각언어는 기묘한 형태를 계속 발명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같은 시선이 여러 이미지와 시간을 통과하며 하나의 법칙으로 남을 때, 비로소 언어가 된다.
내가 만들고 싶은 것은 선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아니다. 왜곡된 표면 아래에서 아직 소멸하지 않은 방향을 바라보는 이미지다.
그것을 끝까지 보고 난 뒤 관객에게 남는 것이 비판이나 교훈이 아니라,
그럼에도 존재한다는 것이 기쁘다는 감각이었으면 한다.
2026.07.27